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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공부 공부, 엄기호책읽기, 기록/교육 관련 2017. 9. 4. 03:14
우리는 흔히 자기자신과 자기 욕망을 동일시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말의 드러내는 바가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곧 나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게 나를 배려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명한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불렀다. '하고 싶은 것'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의 현자들은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둘 수 있는 힘'이다.
탁월함을 '숨의 길이'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숨의 길이를 다루는 정도, 즉 다룸의 기예로 판단한다. 내 숨의 길이가 1분인지 5분인지를 가지고 탁월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내 숨의 길이가 1분이라면 5분이라는 숨의 길이는 애초에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기예와는 무관한 재능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해 숨의 길이가 탁월하게 긴 사람이 있다.(중략) 내 재능과 다른 사람의 재능을 비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이런 재능은, 그것을 받은 사람이나 주변 사람 또는 인류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로 감사하게 사용하며 그 열매를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최고가 아니라 해도 각자의 재능 역시 이런 '선물'처럼 주어진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각자 하늘로부터 얼마나 '풍성한 선물'을 받았는지 비교하는 게 아니다. 관건은 그렇게 선물로 받은 재능을 각자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다. 이렇게 되면 주어진 것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가, 그 선용의 정도가 탁월함의 기준이 된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는 탁월함이다. (161쪽)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숨가쁘게 지냈던,
다이어리에 하고 싶은 일을 빼곡하게 적어놓고 매일 밤 다 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며 잠들었던,
그래서 계획을 지킨 날이라곤 인생의 사흘밖에 안되는 나에게 필요한 말.
'나'≠'내가 하고 싶은 것'
어느 순간 돌아보니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시작해서 엄기호 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교육 관련한 이야기는 [현실 분석+대안 제시]의 구조일 때가 많은데 보통 현실을 분석한 부분은 미친듯이 공감하면서, 뒷부분은 조금은 갸웃하면서 읽곤 한다.
이번에도 교육현장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공감됐다.
옛날에는 신분 상승을 위해 공부하고, 교사도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었다면
그 이후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며 행복과 자아실현을 지향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아마 내가 학교 다닐 때쯤..?)지금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으며 다수의 학생들은 아무리 공부해도 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아 공부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학교 역시 안전을 중시하면서 이들을 강제로 공부시키기를 포기하고 목적을 상실한 무기력이 만성화되었다는 지적.특히 진로교육을 강조하고, 자소서에서도 '내가 나의 꿈을 위해 이런 노력들을 해 왔다'를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꿈'이 해방의 언어가 아니라 억압과 강압의 언어가 되었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속이 시원했다.76p. 생애사적 기획의 관점에서 보면 '꿈을 묻는 교육'을 말한 사람들조차 이 모든 것을 열여덟 살, 즉 대학에 들어가는 나이 이전에 해내야 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79p. 꿈을 가지지 못하면 '찌질한' 사람이 되고, 꿈을 가지면 그 모든 준비를 열여덟 살 이전에 완수해야 하는 '강압의 언어'. 입시에 대한 압박보다 꿈에 의한 압박이 사람을 더 궁지로 몰아넣고 비참하게 만든다. 부모와 교사가 자기 꿈을 위해 저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는데도 아직 꿈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은 구제불능에 형편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이 때문에 꿈은 청소년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열패감, 즉 열등감과 패배감의 근거가 되어버렸다.이걸 읽고 나니 어쩐지 좀더 내향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내가 애들에게 뭘 해 줄까, 뭘 가르칠까 성급하게 행동하기 이전에 나부터 스스로의 한계를 돌아보고, 내가 가진 것을 다루고 배우는 몸을 만드는 게 우선이지 싶다. 그래서 '가르치는 이의 전문성'에 대한 언급을 인용하며 마무리.144p.흔히 우리는 가르치는 사람을 수업이나 강의의 전문가라고 말한다. 가르치는 일이 바로 수업과 강의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수업을 잘하기 위해 애를 많이 쓴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표준적인 발달 과정에 맞춰 어떤 내용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배운다. 여기에 더해, 잘되는 수업을 모델 삼아 따라 배우면서 가르치는 일의 전문가가 되어간다. '수업/강의 잘하는 사람'이 바로 가르치는 일의 전문가라고 여겨지는 까닭이다.그러나 이것은 반만 맞는 말이다. 나머지 반은 수업이 잘 진행되지 않는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결정한다. 즉, 배움이 일어나는 것을 포착하고 잘 유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배움이 실패했을 때 잘 대처하는 것이 전문가다. 그 실패를 포착해 해석하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가르치는 전문가다. 전문가는 통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돌발적인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수업을 잘하는 기예만큼이나 이 기예의 한계를 잘 아는 것이 전문가의 자기 이해라고 할 수 있다.'책읽기, 기록 > 교육 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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