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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 좀더 생각해 볼 것
    학교에서 하루하루/공립에서 수업하기 2011. 7. 28. 13:50
    <사랑손님과 어머니>에 대한 새로운 접근. 읽으면서 가슴이 몇 번 철렁하였다.



    옥희 어머니는 현재 "스물네 살인데 과부"이다. 옥희의 나이로 미루어 보면, 그녀는 열여덟에 결혼을 하고 일 년 만에 남편을 여읜 후, 유복자로 옥희를 낳았다. 사건은 옥희네 사랑방에 옥희 아버지의 옛 친구가 하숙을 들면서 시작된다. 남들이 예사롭게 보지 않을 일을, 발표 시기로부터 70년 이상 지난 요새 벌어진대도 입길에 오르내릴 그 일을, 역시 그들과 친구 사이인 옥희의 큰외삼촌이 주선한다. 이는 옥희 어머니 친정에서 처음부터 둘을 결합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옥희 어머니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기에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도 하숙을 허락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옥희가 사랑에 갈 때 단장을 시킨다든지 사랑손님이 좋아하는 달걀을 많이 사는 행동 등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중략)
    이제 돌이켜 다시 살펴보자. 무엇이 '순수하고 아름다운'가? 이제가지 살펴본 이 작품의 중심사건과 갈등, 결말 등은 그와 거리가 멀다. 옥희 어머니와 사랑손님이 맺어지지 못한 사건은 사회적 억압에 의한 개인의 좌절에 가까우므로 비극적이고 슬프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데 왜 많은 독자들이 그 점을 읽지 않거나 못하고, 또 읽는다 해도 작품 전체나 재혼 포기라는 중심사건에 대해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며 판단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작자나 작품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독자가 내린 불합리한 판단이나 무비판적으로 따른 어떤 관습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이 문제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작자는 옥희 어머니에게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하는 현실에 비판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이를 소재로 소설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희를 서술자로 삼음으로써 옥희 어머니의 갈등과 좌절을 부드러운 분위기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게 서술하였다. 그것은 주요섭 자신도, 비판적 의지와는 달리, 그것을 당연하고 아름답게 여기는 인습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무의식적으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남성중심주의를 미화하려는 생각을 여전히 마음 한 켠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독자들 역시, 놀랍게도 남성이 아닌 여성들까지, 그 남성중심주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도록 세뇌되어 있어서,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 옥희의 말을 비판적 시각으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옥희는 어머니를 억압하는 세상의 인습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어린애이므로 독자가 사회와의 갈등 측면을 상상해 넣으면서 읽어야 하는데도, 그 아이의 말에서 재미와 순수함을 주로 느낀 것이다. 독자들이 그렇게 읽는 까닭에는, 소설을 사회문화적 맥락에 놓고 읽는 데 등한함과 함께, 앞에서 '독자의 욕망과 그것을 지배하는 관습'이라고 한 것도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의 독자는 대개 남녀 간의 이른바 '순수한 사랑 모티프'를 맹목적으로 아름답게 보면서 좋아하는 낭만적 태도, '순수한 사랑 콤플렉스'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태도를 지니고 있다. 아울러 춘향, 심청, 영채(이광수, 무정), 초봉(채만식, 탁류), 선비(강경애, 인간문제) 등과 같이 '가련한 여인'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최시한,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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