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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_여름의 눈으로 보기일상 2015. 6. 14. 11:44
여러 이유로 잊을 수 없는 영화라서 여러 번 보긴 했는데 맨정신에 다시 본 건 처음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게 많아서 다시 쓰는 감상.
언뜻 보면 썸머 이 나쁜뇬!! 내맘을 갖고 놀고 나한테는 사랑은 안 믿는다고 상처주고 떠난 주제에 딴놈이랑 결혼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다시 보니 톰이 엄청 찌질하다. 멋진 조셉 토끼가 연기해서 그렇게 안 보였던 것뿐이다.
왜 썸머 같은 이쁜이가 톰을 좋아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톰은 건축 일을 하고 싶었다면서 감사카드 쓰는 일을 하고 있는데, 물론 세상에 어릴 때 하고 싶었던 일과는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으니까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 일에 애정도 없고 마지못해 일하는 느낌인 사람은 좀 별로다. 게다가 운명적인 사랑이 나타나면 자기의 잿빛 인생이 무지개빛으로 바뀔 거라는 건 진짜.... 사랑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 같다. 지금 행복해야 사랑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건데 말이다.
그리고 톰의 망상은 가히 특허감이다.
주말 잘 보냈냐는 질문에 "좋았어"라고 대답했더니 "주말에 헬스장에서 만난 놈과 잤다"는 결론을 내리질 않나,
이러고 나서 "난 그녀에게 충분히 기회를 줬어"라고 하질 않나...
물론 쑥맥인 남자가 그럴 수 있다. 짝사랑이 깊어지면 오만 상상과 의미부여를 다 하게 되니까.
하지만 썸머가 저 정도 먼저 다가왔는데도 한 발도 내딛지 못한 건 톰이었다.
게다가 영화 내내 톰이 썸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썸머가 저 대목에서 듣고 싶었던 말은 다른 게 아니었을까?
썸머가 먼저 키스하고, 싸웠을 때에도 썸머가 먼저 손을 내밀고, 썸머가 먼저 이케아에서 장난을 하며 놀고, 스킨십도 그렇고~ 톰은 계속 수동적이다.
둘의 관계에 대해서 비슷한 장면이 또 몇 번 나온다
-톰 : 우리 사이는 뭐야?
-썸머 : 몰라. Who cares? 지금 행복한 데 뭐 어때?
-톰 : 그래 나도 좋아.
계속 진지한 관계를 피하고 벽을 세우고 있는 썸머에게 관계를 규정짓지도 않고 먼저 다가서지도 않고 사랑한다 말도 못하는 톰을 당연히 썸머는 못 믿겠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물론 사회에서 규정하는 남성성/여성성을 따라야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남자가 와서 집적대고 약간은 위협적이었는데도 가만히 있고, 썸머가 해결하게 만들다가 자기 흉을 보니까 그때서야 주먹을 휘두르는 톰은 쫌 못나보인다. 썸머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않다가 자기에 대한 모욕만 방어한 거잖아.
톰의 꿈의 관심을 갖고, 다시 건축학도의 꿈을 키울 수 있게 영감을 주는 것도 썸머였다.
그래도 둘이 오랜만에 재회했을 때, 톰이 <행복의 건축> 책을 썸머에게 선물했을 때는 진짜 기함했다. 그건 네가 관심있어하는 거지, 썸머가 좋아하던 건 아니었잖아!!!!! 아오!! 그 대목에서 톰이 썸머를 사랑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상상의 로맨스 안에서만 머물러있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썸머와 헤어지고 나서야 썸머가 좋아했던 링고 스타 등등을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땐 이미 늦었지. 썸머는 톰에게 관심을 갖고 톰의 세계를 산책했지만 톰은 그녀의 취향도 무시하고 말이야.
톰은 감사 카드 문구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결국 자기 전공대로 건축 회사에 면접을 다니게 된다. 톰이 회사를 그만둘 때 말한 것처럼 감정을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카드를 사는 거라면, 톰도 이제 자기 감정을 숨기는 일을 그만두고 자기가 원하는 걸 찾아나서는 사람을 성장하게 된 게 아닐까, 썸머 덕분에.
그래서 건축회사 면접에서 새로운 여자(어텀)을 만나고, 자기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게 되고. 이렇게 보면 억울한 건 톰이 아니라 썸머다.
썸머가 대체 왜 영화 속의 결혼식 장면을 보고 저렇게 울었겠냐고. 하지만 결국 톰과는 달리 썸머에게 먼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계시네요?'(.....지금 생각해보니 왜 하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었을까? 휴.....) 하고 다가온 남자와 결혼하게 된 걸 보면 썸머 말대로 meant to be 한 거였을 지도.
썸머에게 감정이입을 엄~청 하고 다시 영화를 보니 썸머도 나쁜뇬이 아니고,
나도 나쁜뇬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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