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패키지 여행 후기
    일상/여행지도 2015. 8. 9. 20:41

    쓰고 보니 이 글은 블로그엔 적합하지 않은 글일 수도 있겠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맨 뒤에 있다.


    추천 vs

    귀국하자마자 여행 어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향후 10년간 패키지 여행은 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다시 한번 죽 정리하면서 보니 내가 패키지에 대해서 좋게 생각한 부분도 많이 있어서 놀랐다. 

    그러고보면 장점도 단점도 확실하다. 

    이렇게 보송보송하게 여행을 다닌 적은 없었다. 눈화장도 하고, 하루는 무려 7cm 웨지힐도 신고. 정말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가끔은 캐리어도 번쩍번쩍 들고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자유여행에서는 꿈꿔본 적 없는 일이다. 원래 가방이 무거운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오래 나가있지 않을 것 같으면 우산이나 모자도 차에 두고 내리고, 필요할 것 같으면 버스에 실어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샤샤샥 갖고 내리니 몸이 훨씬 편했다.

    게다가 관광지에서도 얼마나 편안한가. 가이드들이 미리 예약을 해 두니 사람 많은 곳에서도 줄서서 뭔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지갑을 잃어버려도 일단 나는 집에 갈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다. 유럽에서 이렇게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먹고 다닌 건 처음.

    길치인 나는 사실 패키지 여행에서도 자유시간을 주었을 때 길을 한 번 잘못 들긴 했는데, 그래도 훨씬 헤매는 시간 없이 관광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다.


    비추천

    그런데,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은 똑같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원래도 짧은 여행 동안 얼마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더더욱) 보기 힘들다. 내가 여행을 할 때 사람들이 퇴근 후에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가는 모습, 주민들의 출근길, 지하철에서의 행동, 길을 알려주는 태도 등등을 통해서 그 나라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가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왔다는 걸 이번 여행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다른 것들도 똑같이 뒤집으면 단점이 된다. 가이드들이 미리 예약을 해 두는 만큼, 그 이외의 곳을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항상 시간을 맞추기 위해 터무니없이 촉박하게 움직여야 한다. 사실 체스키크롬노프에서도 단 두 시간을 머물렀는데, 나는 정말정말 아쉬웠다. 할슈타트에선 40분 있었지. 이런 식이다 보니, 계속해서 '급히 사진찍고 다른 곳에서 또 사진찍고 시간 맞춰서 버스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내가 의미부여증후군이 약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회의감을 자주 느꼈다. 꼭 뭔가 느끼고 생각하는 게 아니더라도 그냥 맛있는 것 먹고 좋은 풍경들을 눈에, 마음에 담고 오면 그걸로도 충분한데 시간에 쫓기기만 하고 그것조차 안 되니 많이 안타까웠다.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먹는 것도, 음식의 선택권이 없다. 물론 내가 엄청난 소화력을 갖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세 끼를 계속 정해진 대로 먹이니까, 식당에 앉으면 일단 뭔가 먹게 되고 배가 계속 불러 있으니 군.것.질.을 하고 싶은데 시간도 위장의 공간도 소화력도 부족하다. 길에서 구운 소세지나 바베큐, 특이한 빵, 요거트 등등 많이 먹어보고 싶었는데. 그리고 피자 본토는 아니지만 솔솔 냄새가 나면 피자가 먹고 싶었던 적도 있고 이 나라의 맥도널드나 스타벅스는 어떨까 한번 들어가보고 싶기도 했다. 세 끼를 먹여주는 것에 감사만 한다면 좋겠지만 이번 패키지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부실하고 맛없는 식사는 처음이라고 불평할 정도로 식사의 질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데려다 주는 대로 다녀야 한다는 거~)


    가장 큰 마음

    한데 계속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시차 적응이 잘 안 되는 것 빼고는 내가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유럽여행은 나에게 비싼 마약이었다. 가고 싶은 곳을 정해서 한참 맘먹고 돈도 모아서 다녀오는 게 힘든 대신, 마음을 정말 많이 비우고 올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이 세상의 여러 모습 중 하나일 뿐, 내가 신경쓰는 타인의 시선, 결혼에 대한 압박,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여자로서 부과되는 굴레에 대한 답답함, 우리 나라 시스템에 대한 불만 등등... 이런 것들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많이 내려두고 올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건 어디에 있든 내 마음에 달린 것이지만.. 완전 다른 환경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나랑 머리색만큼이나 사고방식도 다른 유럽 애들과도 종종 기차나 게스트 하우스 같은 데에서 이야기하고나면 또 달랐다.  그래서 더 싸고 가까운 아시아권보다 멀리멀리 날아가는 여행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패키지에서 '자유에 대한 제한'에 대한 각오는 어느 정도 하고 왔지만 '한국인 단체 여행'에 대한 생각은 많이 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패키지에서 나이 많은 분들이 많다보니 종종 영혼 없는 리액션을 해야 할 때도 있었고, '아무래도 여자는 스물 일곱쯤 되면 시들기 시작하니 시집을 빨리 가야 한다'는 말을 식사 중에 들었을 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크리스탈이 "아이고~~ 너무 시들어서 죄송하네~~" 이럴 땐 말리긴 했지만, 물론 나는 누가 저런 말을 나에게 해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지만 원래 저런 말을 듣기 싫어서 여행온 게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박정희 팬들은 어떻게 어딜 가나 저렇게 자신있게 자기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공감을 구할 수 있는 건지, 정말 앞으로는 듣고 싶지 않으면 먼저 나의 정치적 취향부터 말하고 나서 대화를 시작해야할까보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여행을 준비하는 데에 힘을 쓰고 싶지 않았던 건 사실이고 그래서 한 선택이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라, 원하는 걸 해라, 권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는 꼭 싫어하는 걸 겪고나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때가 많다. 체스키크롬노프는 예뻤고 이번 패키지 여행을 통해 내가 원하는 여행이 어떤 것인지 더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이 의미있었다.  여행기 끝:)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