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눈동자가 실제로는 빛나지 않는데도 왠지 빛이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사람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미소를 지을 때든 아니든 언제나 차분하며, 빛이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홍채의 색깔 속에 빛이 붙잡혀 있는 것
같아서, 가끔 눈이 노란색으로 보일 때가 있다.
-「두 도공」 중
도리스 레싱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자꾸 옷자락이 못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페이지를 넘기려다가도 자꾸 멈칫하게 되는 멋진 문장이 가득하다.
『19호실로
가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표제작인 「19호실로 가다」. 한 줄로 요약하면 가정을 위해 자신을 포기했던 여자가
혼자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한다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직접적으로 '박탈감을 느꼈다'는 식의 서술은 없는데도, 그녀가 가정에서 느낀
무력감이나 답답한 공기를 너무나도 공감가게 그렸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할 수 있는 19호실을 원하는
수전. 엄마, 아내라는 역할로만 갇혀있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지만 그녀가 19호실로 간 이유가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
대한 분노,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하는 좌절감이라고만 표현하기도 어려운 것 같다. 그렇게만 한정짓자니 왠지 작품에 누를 끼치는
기분이 든다. 좀더 인간 본연의 뭔가를 바랐을 것도 같다. 『사랑하는 습관』에 실린 인터뷰를 보니 작가 자신도 그녀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최종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옥상 위의 여자」를 읽으면서 너무 신랄해서 즐거웠다.
나라면
"쟤 진짜 자뻑 쩔어, 눈만 마주쳐도 여자들이 지 좋아하는 줄 알아." 하고 지나갔을 남자들의 행동을 이렇게 이야기로 빚어낼 수
있다니, 이래서 소설을 읽는 거였지, 싶다. 여자들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한 개인으로 보지를 못하고 어떻게든 대상화하고
싶어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졌다.
『사랑하는 습관』에 실린 「동굴을 지나서」는 나중에 애들이랑 같이 읽고 싶어서 아예 타이핑해뒀다. 단편성장소설 같은 느낌이다.
제리는 자신이 그 구멍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당황해서 영어로 소리쳤다. “날 봐! 날 봐!" 그러고는 멍청한 개처럼 손으로 물을 철벅거리고 발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제리가 잘 아는 표정이었다. 뭔가 실수를 하거나 뜻한 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 제리가 어머니의 관심을 끌려고 익살을 떨면, 어머니는 저렇게 심각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살피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휴가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 애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다이빙을 해 보는데 애들은 바다로 뛰어들어서 자기들만 아는 구멍을
통과해서 바위 뒤편으로 뾰로롱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소외감을 느끼고 뭐든 해보지만 그애들에겐 가 닿지 않고 그저 우스워질 뿐인
상황을 이런 식으로 그려낸 것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사람의 감정을 참 꼼꼼하게도 그려낸다.
단편집인 『19호실로 가다』를 다 읽고 지금은 두 번째 단편선인 『사랑하는 습관』을 읽고 있는데 얼른 다 읽고 장편들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