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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책읽기, 기록 2020. 11. 6. 10:56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퍼트리샤 포즈너/북트리거

    "나의 투쟁"의 악몽을 현실로 만들어 준 마법사들(텔포드 테일러, 미국 전범죄 수석검사)


    홀로코스트에 대해. 지금까지는주로 유대인의 관점에서 수용소의 끔찍한 생활에 대해 증언하는 이야기를 접해왔다. 안네의 일기, 아트 슈피겔만의 <쥐> 같은 작품들.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해자 한명 한명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대규모의 학살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 약, 기술은 어디에서 왔는가.

    전쟁을 위해 화학 기술이 필요했던 나치와 무료 노동력을 공급받고 싶었던 파르벤이 결탁해가는 과정을 그린 초반부의 흡입력이 상당하다. 나치가 화학 기업 파르벤을 장악하고 식민지 화학 기업들을 거침없이 합병해가는 과정도 그렇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속성상 파르벤이 하는 행태에 이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나치가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다뤄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생산력이 떨어지자 파르벤은 급기야 자체 수용소를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수감자들이 수용소에서 공장까지 걸어오는 만큼의 체력을 아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수감자들이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다 죽어도 다음날이면 바로바로 열차를 타고 새로운 노동력들이 도착하니까.
    이후 파르벤은 가스실에 쓰인 독가스, '치클론B'를 제공하기도 한다. 원래 치클론B에는 독가스라고 경고하기 위해 눈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경고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파르벤은 대량학살을 위해 이 경고제를 빼고 무색무취의 독가스를 수용소에 납품한다.
    '파르벤'이란 회사가 낯선 사람도 '아스피린'은 들어봤으리라. 아스피린을 만든 바이엘이 바로 이 파르벤에서 떨어져 나왔다. 최근 피부질환 때문에 바르는 연고가 화장대에 굴러다니는데, 거기 박힌 바이엘 로고를 볼 때마다 어찌나 씁쓸한지. 수감자들의 노역과 생체실험을 기반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의약회사. 옆나라의 미쓰비시 같은 기업뿐 아니라 수많은 전범 기업들이 잘나가고 있었구나. 책임 소재도 불분명하다는 변명 뒤에 숨은 채로.

    240페이지까지 실린 가제본을 처음 받았을 때 금방 읽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충격적이어서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다가도, 중간중간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힘들다. 생체실험에 빠져서 실험실 한쪽 벽을 인간의 눈알로 빼곡히 장식한 의사 멩겔레. 발진 티푸스, 결핵 등 다양한 병에 수감자들을 감염시켰다가 파르벤 약물로 실험하고, 곧바로 '신규 주문 발주'를 하는 의사들.(물론 파르벤/바이엘 같은 기업의 막대한 후원을 받았다.) 이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수감자들을 거침없이 잔인하게 다루는 이 책의 주인공 카페시우스. 학살당한 유대인들에게서 금니를 뽑아 트렁크에 가득 채우고, 전쟁이 끝난 후 이 돈을 바탕으로 약국을 차렸다는 이야기는 정말 역겹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과 내연녀에게는 어찌나 따뜻한 이웃인 것처럼 구는지.

     

     

     

    가제본에 실린 19챕터까지, 카페시우스는 전범 재판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간다. 나는 이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이 아니기를 바란다. 책의 뒷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더 많은 가해자들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역사가 그들의 행위를 똑똑히 기억하기를 바란다.

     

    *출판사 이벤트에 당첨되어 출간전 샘플을 읽고 쓴 감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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