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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고요/기준영책읽기, 기록 2020. 11. 15. 15:27
가을이 시작할 때쯤 읽기 시작한 것 같은데 이제야. 소설을 읽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오독으로 가득한 완독일 것 같아 부끄럽다.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가장 마지막에 실린 <유미>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주인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잠시 맡게 된 빈티지 상점에서, 가영은 의미 있는 걸 흘렸다며 안절부절 못하는 손님 하나를 만난다. 저녁 때 꼬마 윤진이가 남겨두고 간 메모를 통해 그 남자손님의 물건을 찾게 되고, 그를 기다리며 가영은 말한다. "그분이 무슨 이야기든 하려고 드신다면, 전 좀 들어볼까 봐요."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이 바로 이런 이야기들이다.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찾아나가는지, 혹은 타인의 도움으로 어떻게 그 상실감을 메워나가는지 조용조용 들려준다.
두 번 읽은 작품은 <마켓>. 그보다 더 여러 번 읽은 건 <사치와 고요>,<비둘기와 백합과 태양에게>.
첫 작품인 <마켓>부터. 아이를 유산했지만 자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은 걸 아이가 알고 '난 여기서 내립니다. 어머니, 다음 생에서 만나요.'하고 사라진 것 같다는 망상을 할 정도로 절망감에 빠졌던 시연. 자신과 같은 꿈을 꾼 남편의 사랑을 다시 한번 받아들이는 그 장면이 몹시 울렸다.
표제작인 <사치와 고요>는 괴한에게 칼을 맞고 잠시 쉬려던 미주가, 전남친 소개로 보모를 맡은 아이들과의 만남 이야기. 죽은 친엄마의 흔적을 지키기 위한 아이들의 악착같은 의지가 안쓰러웠다. 미주는 그런 아이들에게, 죽은 자신의 엄마를 그리워하며 쓴 세리 이모의 편지를 보여준다. 아이들도, 아이들의 할머니도, 미주도 죽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밤. (아마도)그리운 사람들이 탄 회전목마가 그들이 머무는 집을 둘러싸고 빙글빙글 도는 밤. 와 정말 어떻게 이런 장면을 그려내지.
<비둘기와 백합과 태양에게>는 순전히 인물들의 연결-연결-연결이 재미있었다. 밴드 공연에서 대학생활 전부가 담긴 USB를 잃어버린 은하, 알바 자리를 잃어버린 룸메이트 한진, 활동하던 밴드를 잃어버린 태오. '태오를 초대하자!'는 엄마의 귀여운 발상. 다른 작품에선 주로 '엄마'와 비슷한 역할을 아이들이 하는 듯한데, 엄마가 이런 대담한 제안을 한다는 게 재미있었다. 덕분에 그들을 특별한 위로의 시간을 얻는다. 스포는 하지 않았습니다. 진짜예요 읽어보면 앎.
풀리지 않는 궁금함은 <축복>.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밥이나 대접하겠다'고 연락했는데, 할머니는 거식증이다. 둘은 어떻게 사귀게 되었을까?'책읽기,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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