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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하워드 진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가서 <오만한 제국>아니면 <달리는 기차 어쩌고>를 빌려 읽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딱히 그전에 샐린저에 대해 관심은 없었지만) 샐린더 타계 기사를
책장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호밀밭의 파수꾼을 집어낼 핑계로 삼아 읽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쯤 이 책을 사서 읽었던 듯한데, 아마 하루키의 영향일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아니면 다른 어떤 장편에서 이 책이 언급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나서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진 않았었다. 역시 미국이랑 우리랑 문화적 차이가 커서 그런지 공감이 안돼, 일단 읽으면 너무 우울해져서 미치겠어 등등의 인상이 남아있던 소설이다. 그래서 좀처럼 다시 꺼내들게 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어떻게 하면 시간을 쉽게 생각없이 흘려보낼지 고민하는 요즘이기에.. 다시 읽게 되었다.
다시 읽으면서 나는 예전에 읽어내지 못한 많은 것들을 읽었다. 그리고 뭐랄까.. 이건 주인공이 청소년일 뿐이지 성인을 위한 소설이란 깨달음? (데미안=_=처럼 성장소설이 아니다_) 같은 걸 느꼈다. 몇 가지 적어보면..
내가
기억하기에, 난 어릴 때 영화를 볼 때도 그렇고 소설을 읽을 때도 그렇고, 무엇보다 서사 구조에 중점을 두며 감상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영화를 보면서 스토리에 집중해서 평가할 뿐, 화면의 색감이라든가 구도 등의 영화 특유의 요소는 잘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소설도 다시 읽어보니 재치있는 표현이 많아서 많이 웃으면서 읽었는데, 어릴 땐 그냥, 뭐야 3일동안 싸돌아다닌 우울한 얘기잖아 정도로 생각했던 게 아닐까.
이
소설 속의 홀든은 불만으로 가득차 있다. 친구들을 얘기할 때에도 저놈은 이래서 더러운 놈이고, 저놈은 항상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자기가 자러 들어갈 때엔 꼭 다른 친구들도 방으로 들어가길 바라는(이런 부분이 굉장히 섬세하다고 생각한다!) 놈이고 이런 식.
아직 나도 사회 경험이 많다든가 여러 사람을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가 욕하는 사람들이나 사회의 가식적인 면이 상당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친구 험담을 하는 게 아니라, 인간세상의 가식을 꼬집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16살의 홀든은
또 그 사람들에게 정이 든 것을 숨기지 못한다. 아, 이런 게 순수한 것이구나 싶다.
그래서 이게 청소년을 위한 성장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장소설이라고 한다면 결국 자신의 고집을 꺾고 세계와 자신의 조화를 찾아가는 그런 뭔가가 있는 게 아닌가; 어쨌든 신문 광고에선 어디어디에서 선정한 도서라고 하면서 청소년 권장 도서처럼 말하는데.. 음 모르겠다. (어쩌면 이건 임고 공부의 후유증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성장 소설의 엄밀한 의미를 생각하면서 카피를 만들까)
그리고, 하루를 이야기하는데에 170쪽이 드는 이야기가 나는 좋다. 내가 뭔가 쓸 때에도 선이 굵은 편이 아니어서 그런지, 이랬고 저랬고 세세하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 글이 좀더 공감하기 쉬운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그러나 우리 부모는, 특히 엄마는 사냥개 같은 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의 방문 앞을 지날 때는 서두르지 않고 조용조용 지나갔다. 숨도 완전히 죽이고, 아버지는 머리를 의자로 맞는다 해도 눈을 뜨지 않겠지만 엄마의 경우는 시베리아에서 기침하는 소리까지 다 듣고 계실 정도였다. 엄마는 신경이 너무나 예민했다. (...)
우리집만 그런가? 엄마는 새벽에 내가 물먹는 소리까지 다 듣고 계신다. 이 부분을 읽고 막 웃다가 엄마한테 읽어드리고는 아침마다 써먹고 있다.("너 새벽 4시에 일어났었지?" "엄마, 또 시베리아에서 기침하는 소리까지 들은거야?" 이런식이다)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다녀오는데
사회의 가식과 타협하지 못하는 아이는 결국 정신분열을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하는 쓸쓸함이 남았다.
하지만 내 가슴 한 구석에도 홀든과 같은 예민함, 그리고 동생이 죽었을 때에 차유리를 다 깨부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있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