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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유럽 어슬렁 #1
    일상/여행지도 2014. 8. 9. 00:03



    지난 유럽 여행 때는 정말 열심히 일기를 썼었는데,
    이번 여행은 더 여유롭게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일기를 쓸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려웠다. 초반에는 '그래, 이따 기차 안에서 밀린 일기를 써야지'했는데 막상 기차를 타면 풍경 구경하는데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그런 식. 그래서 한 사나흘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냥 잊혀지면 잊혀지는 대로, 여행이 다 끝나고 나서 마음에 남는 것들만 정리해보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일정이 세세히 기억나지 않는 부분도 많고, 서유럽 때와는 달리 그렇게 촘촘히 계획해서 다니지도 않았던 여행이기 때문에 몇 가지 주제 위주로 감상을 써 보려고 한다. 꼭 중요한 것부터 쓰는 건 아니고 생각나는 순서대로. 여행글 계의 제임스 조이스랄까=_= 죄송합니다.. 

    사족. 경험도 많지 않아 어리버리한 나의 여행을 너무 풍요롭게 만들어주신 동행(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Alone. 어쨌든 분리된다는 것.
    사실 내가 여행에서 가장 바라는 것은 멋진 풍경을 보고 오는 것도,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오는 것도 아니었다. 아시아 쪽을 여행하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2012년의 그 홀가분한 기분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내가 그동안 압박을 느끼고 있던 모든 것들- 그 당시엔 '결혼을 빨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왜 난 제대로 된 연애를 못하고 있을까?' 등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서 자유로워져서,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 사회의 시선과 압력에서 자유로워지는 그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이번 여행에서 다녀와서는 그럼 어땠는가, 하면.. 오히려 그것을 구하고자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감정은 평화롭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조금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 시간은 보낸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아직 많은데, 꼭 결혼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깨닫고 편안해지는 것. 그냥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잊고 그날그날을 즐기는 것. 아무 목적 없이 눈앞의 풍경에 감탄하는 것. 이런 시간들을 보낸 것으로 감사한다. 내가 정말 무슨 대철학자처럼 빙하 꼭대기 위에서 나 자신의 본질과 마주했다면 좋았겠지만 -_-

    편안함
    내가 다닌 도시들은 코펜하겐, 오덴세, 베르겐, 오슬로, 스톡홀름, 헬싱키였다.

    처음에 코펜하겐 in이었는데 사실은 아닌 게 아니라 처음엔 좀 실망했다. 파리에서는 꼭 박물관을 들어가지 않아도 뭔가 화려하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었는데, 북유럽의 도시들은 정말 소박했다. (나쁜 말로 하면 '볼 것 없다'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북유럽에 간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북유럽 볼 거 없다고 했던 게 생각난다.) 아예 한국처럼 쭉쭉 뻗은 현대적인 건물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유럽의 유명한 도시들처럼 전통적인 건물들이 아름답게 골목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대충 섞여 있는데 어쨌든 감탄할 만한 볼거리는 많지 않다. 

    그래서 한편으론 참 편안했다. 미션 수행하듯이 최대한 효율적인 동선을 짜서 가야할 곳들은 콕콕콕 찍어 돌아다니지 않아도, 그냥 슬렁슬렁 산책하면서 모든 명소를 볼 수 있었다. 파리는 닷새를 머물러도 계속 보지 못한 곳이 있어서 아쉬움이 마음 한 구석을 찔렀지만, 헬싱키에서는 반나절만에 이 도시를 다 본 기분이 들어서 골목이나 다녀보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또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편했던 것이자, 내가 북유럽을 혼자 갈 마음을 먹은 이유! 신뢰가 있는 사회이다. 지도를 보며 길을 헤매고 있으면 꼭 와서 누군가 친절하게 "길 잃었니?" 물어봐주신다. 파리였다면, 이 사람도 일종의 소매치기는 아닐까 의심부터 했겠지만 여기서는 누군가의 친절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또 그들도 나를 믿었다. 저 학생이에요~ 하면 별다른 검사 없이 학생 표를 끊어주고, 표 검사 안 하는 경우도 엄청 많았다. 그래서 나는 '표 사지 말걸' 하고 후회한 적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그래, 검사 안 해도 다들 표 사잖아.' 하는 생각의 전환이 오기도 했다. 



    스톡홀름과 오슬로 왕궁. 


    그리고 다른 의미로도 편안했다. 바이킹족이 명나라까지 진출했던 약탈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역시 야만족이었던 건지 먹을 것과 여자만 약탈해온 모양이다. 여자들은 확실히 예쁜 여자들만 엄청 약탈해온 게 분명하다. 지금 북유럽 사람들의 외모를 보면. 그런데 분명 루브르에서는, 보니까 좋긴 한데 왜 함무라비 법전이 여기 있는지! 외규장각 의궤는 왜 우리한테 안 돌려주고 영구임대라는 말인지 막걸린지를 하고 있는지!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런데 북유럽에는 다른 곳에서 약탈해와서 자기네의 문화적 자산인 것 마냥 자랑하는 것들도 별로 없을 뿐더러 거리를 돌아다녀도 뭔가 뽐내는 듯한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 자체가 없다. 왕궁도 세상에 이렇게 작아서야 가이드북 아니었으면 왕궁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너네는 조선만큼도 안됐구나? 하고 웃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들은 아랫것들을 엄청나게 죽여가면서 자기 위세를 떨치는 그런 문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왕권이 약한 역사였는지는 다시 살펴봐야 알겠지만. 

    사람이 없어서 마음 편하기도 했다. 강남이나 이런 사람 많은 데에선 기가 쪽쪽 빨리는 것 같아서 하는 일 없이 피곤한데, 여기는 수도에서도 길거리 돌아다니는 사람 숫자는 평촌 정도? 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한국이 얼마나 복작복작하고 (좋은 말로) 활기찬 사회였는지 느끼게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노르웨이의 경치가 너무 좋은 피오르드 주변. 우리나라였다면 고기 굽고, 카페 생기고, 음식점으로 길거리가 가득 차고 사람 엄청 많고 난리일텐데 여기는 관광객이 많아도 계속 여백이 있는 느낌이었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는 이런 분위기를 힐링이라 하겠지.

    이들의 삶의 오슬로에서 만난 유학생 테오는 그래서 불만인 것도 있다고 했다. 노르웨이 아이들의 공부하는 분위기 자체가 절박하게 막~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즐기듯이, 쉬엄쉬엄 한댄다. 그러다 보니 주로 팀 과제 위주로 진행이 되기도 하고 해서 자기도 여기 학생들 분위기에 휩쓸려 좀 널널하게 공부하게 된다고 한다.  교육비가 유학생에게도 무료이긴 하지만, 생활비가 있으니까 자기는 엄청난 물가를 감수하고 여기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좀더 치열하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갈등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쁜 말로 하면 지루하고, 나태하고, 좋은 말로 하면 여유롭고 소박하고 편안한 북유럽. 그래서인가, 티볼리 공원에서 정말 재미없어 보이는 놀이기구를 타면서 사람들은 엄청 즐거워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놀거리가 엄청 많은 나라에서 온 서울 촌년은 그들이 여전히 잘 이해는 안 되었지만, 덕분에 여행 내내 마음 편히 다녔다. 

    남은 이야기가 엄청 많지만 내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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