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서울국어교사모임에서 정희진 강연을 한다고 해서, 손에 잡게 되었다. 대학교 때 좀 쉬운 여성학 책을 찾다가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은 이후론 별로 이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강연을 들어보니 뭔가 말도 우물우물 엄청 빨리 하는데 사람 마음을 콕콕 찌르고, 무엇보다 엄청 재미있고(!) 참 매력적인 사람이구나 싶어서 결국 책도 끝까지 다 읽었다.
요즘 사실 책읽기에도, 독서교육에도 좀 마음이 시들했다. 교육에 관해서는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 아이들이 자기 말을 한 줄이라도 쓸 수 있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는 생각에 글쓰기에 더 관심을 많이 가졌고, 책 안 읽는다고 자책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책 안 읽어도 돼. 너 열심히 살잖아. 책은 그냥 지적 유희 같아. 실제 삶이 중요하지'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어른책을, '생계'가 아닌 이유로, 읽으니 진짜 행복했다. (생계-수업 준비, 독서교육- 때문에 청소년 소설이나 애들에게 읽힐 만한 책, 학급문고에 넣을 만한 책을 미리 읽거나.... 그런 독서가 많아서 요즘 더 지쳤던가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즐거움이, 이 책의 에필로그에도 예쁘게 정리되어 있어서 좀 놀랐다.
299p. 좋은 독후감의 전제는 '다르게 읽기'다. 단언컨대 모든 사람이 알 만한 진부한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나는 좋은 책이 반드시 좋은 독후감을 낳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독후감은 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과 읽기의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책의 수준과 무관하다. 독후감을 잘 쓰는 사람은 '국정홍보처 간행물'이나 '황색 저널'로도 훌륭한 독후감을 쓸 수 있다.
그러니까 연애지침서를 비롯한 각종 실용 서적, 그리고 김진명의 소설 등등을 나도 모르게 '아랫것'처럼 취급해 오곤 했는데, 설령 내가 종종 그런 책을 읽더라도 맛난 불량식품 정도로 생각하는. 그런데 그러한 책들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참 신선했다. 독자의 생각이 있다면 그런 책과도 만남을 이룰 수 있다. 안그래도 요즘 일부 연애서적을 보면서 이런 책들이 지배 이데올로기, 이를테면 가부장제를 더 공고하게 해 주는 것 같다....성역할을 엄청 고정시키는 것 같다 생각했는데 그런 것들도 독후감이 될 수 있으리라.
113p. 희망은 마음의 욕망이다. 현실이 아니다. 사람은 희망 없이 못 산다고 하지만 착각 없이, 이데올로기 없이, 통념 없이 못 살 뿐이다. 희망보다는 신앙을 갖는 게 낫다. 희망은 관념론이고 신앙은 유물론이다. 희망에는 더 큰 욕망과 실망이 따르지만 신앙은 겸손의 미덕과 포기의 위안을 준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연애서적에서 관계와 인식에 대한 생각을 이끌어낸 이런 부분.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문장들, 나조차도 '모든 사람'과 같이 읽을 법한 이야기를 다르게 읽어 내는 데에서 오는 신선함, 머리를 댕 맞은 것 같은데 되게 시원했다.
74p.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라? 내가 몹시 경계하는 말이다. 턱뼈 탑은 한국 사회에서 생각대로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종착이고, <손 무덤>은 삶을 재현하고 생각한 예술이다.
'불필요한' 성형 시술은 사회적 요구를 몸에 실현하여 체제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한 대로 사는 것은 '지금 자기'를 부정하고 욕망을 따르는 가치 지향적 삶이다. 그 가치가 바람직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 이 말은 경쟁 사회의 자기 다짐이고, 다이어리 첫 장에 등장하는 문구이다. 경제적 성취든 인격과 실럭 배양이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 무덤/박노해)
소싯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친구들이 싸이 첫화면에, 혹은 카톡 프로필에 써봤음직한 말인데 이런 의미로 읽힐 수도 있는 거였다.
185p. 군대는 중세 시대 용병에서 국민국가의 남성 징병제 그리고 다시 글로벌 기업의 경제 활동으로 변화하고 있다. '전쟁주식회사'의 등장이 그것이다. 전문화된 군대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저자는 징병제가 군대의 민영화, 프로페셔널리즘을 피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자 '군대로부터 군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여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문제가 공유되고 약자의 고통이 가시화, 공감, 분담되는 '시끄러운' 상황이 평화다. 지원병제는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조용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징병제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이다. (세계화 시대의 국가 안보)
새로운 것을 알고 느끼는 즐거움. 나는 지금 징병제의 여러 가지 모순에 대해 생각하면서, 모병제가 답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자본주의와 결합해서 정말 이런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개인적으로..정말이지 이 몇년간.... 연애를 하고 싶어서 힘들었는데... 학교 다닐 때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만나다가 연애를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소개를 통해서 만나면.. 고정된 성역할에서의 여성성을 연기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마주치는 남성들이 원하는 만큼 내가 여성의 역할을 고맙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왜 나는 남자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열심히 그 사람을 위해 이것저것 해 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닌가,
아이를 잘 키워내는 걸 삶의 목표로 하는 사람이 아닌가,
밤낮 야근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살림과 감정노동을 맡아야 하는 게 나의 결혼이겠구나, 등등의 생각으로 괴로웠는데........ 그녀가 읽은 책에 대해 서술하면서 필연적으로 정희진 자체가 갖고 있는 시각이 반영되는데, 그것 자체가 너무 좋을 때도 있었다. 굳이 저런 걸로 괴로워하면서 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134p. 인간에 대한 착취가 인류 문명의 기초라는 점은 상식이지만, 그것이 사랑과 가족의 이름으로 벌어질 때 구체적인 개인의 인생은 참혹하다. 하지만 이 책은 여자가 남자 때문에 고통, 가난, 질병으로 죽어서 억울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에 억울한 일은 이런 일 말고도 수두룩하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주제는 사회 구성 원리로서 성별 분석이자 관계의 윤리에 관한 질문이다. 문제는, 그래도 되는 사회와 남자다.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모든 이들이 하루를 되돌아보는 말이길 바란다. (남과 여에 관한 우울하고 슬픈 결론)
144p. 24시간 타인의 끼니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일상. 왜 세상은 가사 노동자를 존경하지 않는지, 나는 왜 평생 '초월적'이지 못하고 반찬거리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한지, 왜 사람들은 내 글이 사소한 이슈를 다루는데도 어렵다고 '강조'하는지..... 크고 작은 수수께끼들이 해명되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세상 그 누가, 이 권력을 포기하겠는가. 식사 준비의 번거로움, 귀찮음, 먹는 사람의 평가, 남은 음식과 치우기 걱정은커녕 아예 그런 발상 자체와 무관한 삶. 누가 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권리와 '마음의 평화', 자유를 포기하겠는가.
나 같아도 목숨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걸고 이 권력을 지키리라. 이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한 줌도 안 되는 '꼴통 페미'들을 사냥하리라. 그들이 쓰는 글에 악플을 다는 데 인생을 바치리라.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평가만 하면 되는, 인간 최고의 안락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게다가, 세상은 완전 내 편(밥 안해도 되는 사람)이 아닌가!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숨차게 읽었다. 정말 오랜만에, 독자가 되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걸 배웠다.
302p.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독후감, 책을 다시 쓰는 것, 저자가 쓰지 못한/않은 부분을 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 곧 새로운 정치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305p. 독자의 위치성, 그 위치성을 의식하고 의심하고 사랑하는 읽기가 책의 위상을 결정한다. 영화든 드라마든 미술 작품이든 책이든 모든 텍스트는 철저히 읽는 이의 상황에 의존한다. "저자는 죽었다.", "책은 독자가 다시 쓴다."라는 말은 권력이 결국 읽는 이, 듣는 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언제나 문제는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