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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수업일기.학교에서 하루하루/공립에서 수업하기 2015. 5. 6. 22:06
어릴 때에 그냥 '반어적 제목'과, 조금 더 하면 김 첨지가 거친 남자였다는 것만 기억에 남았던 소설이었다. 그런데 막상 수업을 하며 여러 번 다시 읽으니 지금까지 <운수 좋은 날>을 그렇게만 기억했다는 것이 좀 미안했다.
그러니까, 그때엔 김 첨지가 얼마나 처절하게 가난했던 것인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수업 자료를 만들면서 지금 물가로 계산해보니 김 첨지가 살았던 월셋방은 무려 한 달에 4만원. 이때 진짜 놀랐다. 아이들에게 내가 2007년 즈음 살았던 25만원짜리 고시원 방의 구조를 그려주고 나서, 이것보다 여섯 배 나쁜 방에서 온 가족이 산 거라고 이야기해주었는데 그걸로 실감이 좀 나긴 할까. 작년에 '모모' 수업을 할 때에도 그렇고 내가 감동 받고 흥분해서 문학 수업을 한데도 아이들에게 얼마나 전달되었을지 궁금할 때가 많다. 아이들이 가끔 '아...' 하고 놀라는 반응을 할 때도 있고 눈빛이 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머릿속에 들어가볼 수도 없고 거참.
반어적인 제목의 의미도.....! 너무나도 불행한 삶 속에서 하루에 10몇만원 번 정도의 작은 행운이 너무 기쁜데, 그것을 누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이었다는 걸 이제 좀 제대로 이해한 것 같다.
수업할 때에는 일단 눈으로 본문을 읽으면서, 글을 읽어야 답할 수 있는 내용확인 프린트를 채우게 했다. 이렇게 긴 글을 공부할 때에는 항상 '교실에서 동시에 다같이 소리내어 읽는 게 좋을까?' '그냥 눈으로 읽는 게 더 집중이 잘 될까?' 하고 갈등하는데, 이번에 함께 3학년 수업을 하면서 같은 교무실에 있는 쌤도 그냥 눈으로(정확히는 '눈과 머리로'이다!!) 읽힐 때가 많다고 해서 나도 좀더 이쪽 방법을 많이 쓰게 된 것 같다.
70년대에도 영화로 만들어졌던 것 같기는 한데 이번에 메밀꽃+봄봄+운수좋은날을 묶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이 참 잘 되어서, 본문을 읽고 나서 내용학습 겸 아이들과 한 시간 함께 보았다. 색감도 예쁘고, 원작에 매우 충실해서 수업 시간에 보기가 참 좋았다.
그리고 주제나 표현,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고 나서, 나의 야심작인 김첨지의 알리바이 글쓰기.
퇴근하고 돌아와서 배우자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상식적으로 가장 먼저 의심받는 것은 남편이다, 라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평소에 아내를 때리기도 했다던데' '가난해서 병든 아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 아니냐' '김 첨지가 치삼이에게 아내가 죽었다며 우는 게 의심스럽지 않느냐' 등등 형사가 김 첨지를 의심할 수 있는 여러 근거를 들어보고, 김 첨지의 알리바이를 한 페이지로 써 보라고 했다. 알리바이를 이야기하면서 감정에 호소하는 것도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원래 나의 의도는 알리바이를 쓰면서 소설을 한번 쭉-다시 정리해보는 거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9반 이 모양의 글이다.
저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죽던 날, 저는 여느 때와 같이 인력거를 끌었습니다. 그날 아내는 평소와 다르게 저보고 집에 붙어있으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아내는 자신이 죽을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열흘 동안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기에 병든 아내와 개똥이를 먹여살리기 위해 일을 나가야만 했습니다.
제 주변 이웃들과 마나님은 저희 아내가 오래 전부터 아팠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약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약을 사더라도 그놈의 병이란 것은 약을 주면 재미를 붙여 계속 온다는 것이 제 신조였기 때문에 저는 아내가 낫기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내의 뺨을 때린다는 소리가 있는데, 제가 아내의 뺨을 때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아내가 아파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정신을 차리라는 뜻에서 때린 것입니다. 제가 어찌 아내를 화풀이 대상으로 쓸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제가 일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치삼이와 같이 술을 왜 마셨느냐는 의혹이 있는데 그것은 저도 이미 오늘 아침 떼어놓고 간 아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하여 집에 들어가기가 불안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열흘 동안 돈 한 품 벌지 못하다 3원이나 번 것도 괜히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치삼이가 그날 따라 반가웠죠. 치삼이와 술을 연거푸 마시다 보니 술기운이 올라 아내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치삼이에게 아내가 죽었ㄷ다고 말했습니다. 술기운을 빌어 말이지요.
게다가 제가 아내를 죽였다면 어떻게 아내가 먹고 싶다고 하던 설렁탕을 사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제가 설렁탕을 사 들고 집에 도착하는 순간 이미 제 아내는 죽어있었고 세 살인 개똥이는 제 어미가 죽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어미의 젖을 빨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저를 의심하시나 본데 방 안에는 아무 흉기도 목을 조른 흔적도 없습니다. 당신들은 물증도 없이 심증만으로 나를 체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아직도 아내에게 설렁탕을 진작에 사주지 못한 것이 후회될 뿐입니다
한편, 알리바이보다는 범인을 찾는 소설을 쓰는 애들도 종종 있었다. '알고보니 치삼이가 범인이었다' '개똥이가 죽였다' 등등. 이건 그냥 나의 짧은 경험에서만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이런 게 남학생들의 글의 특성인 것 같다. 한 시간 글쓰기를 했으니, 시험문제로도 활용했는데 동료쌤들이 재미있다고 해 줘서 뿌듯했다.
20. <보기>는 형사와 김 첨지의 대화를 상상한 것이다.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 기>
형사 : 아내가 죽은 것을 언제 알게 되었소?
김 첨지 : 집에 들어와서야 알았습니다. ①어쩐지 집에 들어설 때 느낌이 불길하더라니..
형사 :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한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소?
김 첨지 : 그럼요. 저는 ②아침에 앞집 마마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리고, ③양복쟁이를 정류장에서 동광학교까지 태웠습니다. 그 다음엔 ④남대문 정거장까지 한 학생을 태웠구요. 또 이어서 ⑤전차 정류장에서 여학생 한 명을 태웠지요. 하루 종일 일을 했기에 저의 알리바이는 확실합니다. 승객들과 치삼이가 증인이 되어줄거요.
텍스트에 애정을 가졌을 때에 좀더 신나게 수업할 수도 있다는 걸 간만에 느낀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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