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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문집 제작기5. 릴레이소설을 쓰다가학교에서 하루하루/학급 살림 2016. 2. 9. 11:00
내가 많이 기대했던 릴레이소설. 우리 반 애들이 글솜씨가 엄청 뛰어난 건 아니지만 왠지 재미있게 잘 쓸 것 같았다.
문집을 만든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사람에 한 줄만 쓰기' 같은 제약을 두었다는데, 나는 아예 그렇게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야한다는 생각이 잘 안 들었고 지금도 왜 그래야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애들이 10장씩 쓸 리도 없는데.. 그리고 뭐 글쓰기란 게 그걸 좋아하고 잘 하는 사람도 있고 못 하는 사람도 있는 거니까, 싫으면 한 줄만 띡 써도 되고, 스토리텔링에 욕심이 있는 아이들에겐 많~이 쓸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지 뭐, 하고 생각했다. 한 줄씩만 쓰라고 했던 친구는 결과적으로 애들이 쓴 소설이 별로 재미가 없다고 툴툴댔는데, 나는 애들이 너무 약빨고 쓴 것 같이 써서 이걸 정말 그냥 실을까 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어쨌든 공동 창작물이니까 추억이 될 것 같다.
예전에 동생이 중 1때인가 중 3때 받은 교지에, 그 반 아이들이 쓴 릴레이 소설이 실려있었다. 앞번호가 여학생, 뒷번호가 남학생인 학급에서 아마 번호대로 돌려가면서 썼던 모양인데, 여학생들이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감성 넘치는 로맨스 소설을 만들어놨는데... 두둥. 첫 번째 남학생이 배경을 우주로 바꿔놓았고 두 번째 남학생이 남자 주인공을 죽였다!! 그리고 남은 남자아이들은 신나게 SF를 써댔다. 나중에 읽으니 너무 웃겨서 우리 반 애들한테도 이 얘기를 해줬더니 그 영향인가, 남자애들은 신나게 자기와 이름이 같은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고.. 여자애들은 정말이지 여중생의 감성을 모르는 사람은 기겁할만한...... BL(Boy's Love일거다 아마..)을 썼다. 최근에 쓰기 연구에서도 남학생은 갈등, 사건사고, 범죄에 관한 주제를, 여학생은 협동, 친목, 화합 등의 주제를 좋아한다는데 정말 그런 부분이 있는가보다.
원래는 남/녀 전체가 하나의 소설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앞번호를 차지한 남자애들이 의외로 너무 오랫동안 열심히 쓰는 것이었다. 얘네가 글쓰기에 이렇게 열정을 불태우는 걸 처음 봤는데 어찌 '빨리' '대충' 쓰라는 따위의 재촉을 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이 속도로 진행되면 창비에서 정해준 문집 마감 시한에 맞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과감하게 남자끼리/여자끼리 쓰라고 했다.
의외로 여자애들의 소설을 보면서 고민을 했다. 뭐 그래봤자 스킨십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수위의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소년들끼리 연애를 하는 스토리를 써 놓고 작중 인물의 이름을 우리반 애들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걸 내맘대로 바꾸어도 되나 한참 고민했는데.. 막상 아이들에게
1. 글은 빼도 박도 못하게 기록에 남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이 문집이 배포되면 너희끼리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부모님'들도 독자가 되고, 길이길이 남는다.
2. 성별을 바꿔서.. 만약에 남자애들이 여자끼리 연애하는 소설을 썼는데 거기에 우리반 여학생들의 이름이 들어가게 되면 얼마나 충격적이겠니?
하고 설명했더니 애들도 심각성을 깨닫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애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우리반에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방탄소년단 멤버들의 이름으로 주인공 이름을 다 바꿨다. 그 과정에서 나도 좀 재미있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돌 팬덤에서 팬픽을 쓸 때, 멤버 구성원끼리 연애하는 설정의 팬픽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이건 나도 공감이 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나 아닌) 다른 여자와 연애하는 이야기는 재미없잖아. 어차피 팬덤에서는 그걸 '동성애'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잘생긴 남자 둘'로 받아들이니까, 그냥 '오빠들'의 판타지 스토리인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름 정하려고 방탄소년단에 대해 좀 찾아보는데.. 기획사에서 일부러 묘하게 커플 같은 분위기로 묶는다고 해야 하나... 하튼 꼭 팬들이 팬픽을 생산해내는 과정에서 그런 커플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아이돌 자체도 좀 그런 컨셉을 갖고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이건 근데 내가 그쪽 세계를 잘 모르니까 확신은 못하겠다.
그렇게 해서 문집위원들에게 '그 조합은 괜찮아요'라는 사인까지 받고 나서 ㅋㅋ 문집 원고에 애들 릴레이 소설도 싣게 되었다. 완성된 것이 시험기간이라 내가 직접 타이핑했는데, 아무래도 소재가 소재이다보니.. 교무실에서 타이핑하면서 이렇게 뒤통수를 의식한 적은 처음이다.
둘다 정말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물론, 내가 잘 아는 아이들이 쓴 거고, 누가 어떤 부분을 썼는지 다 아니까 재미있는 것이긴 하다. 특히 남자애들 소설은 우울하거나 힘빠지는 날 읽기도 한다.
등장인물은 모두 우리 반 아이들 이름이다. 계속해서 '나'가 바뀐다. 정말 남자들이 더 자기중심적인 것일까? 소설에 대한 훈련이 덜 된 탓일까? 자기가 쓸 때는 그냥 자기가 '나'다.... 애들이 시점 이론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데 이렇게 아방가르드하게 쓰다니 놀랍다. ㅋㅋ
그리고 앞에 애들이 쓴 걸 주의 깊게 안 읽어서 내용상 모순도 조금 있다. 꿈에서 두 번이나 깬다.
"아~ 애들이 컴퓨터 바이러스랑 병원균 바이러스를 구별을 못하네?"란 동생의 평도 있었음.
여자애들 소설은... 혹시 방탄 팬픽 검색하는 사람들에게 걸릴까봐.. 제발 그 용도로는 읽지 마세요.... 좀 걱정되지만 그냥 올려본다. 재미는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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