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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드백 한 닢
    학교에서 하루하루/학급 살림 2020. 6. 22. 04:41

    온라인 수업 때부터 '아이들은 내 말을 하나도 들을 생각이 없거나, 알아듣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뭔가를 전달해야 하는 것이 몹시 힘들었다. 온라인 수업 땐 전달사항을 글로 쓰니까 요즘 애들이 열심히 안 보는 것이겠거니, 했는데 얼굴 보고 말해도 마찬가지다. 

    조회 시간에 '교실 게시판에 입시전형별로 정리된 자료 붙여놨으니까 참고하라'고 말해준 바로 그날 아침! 말 끝나고 2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쉬는 시간! 어떤 애가 논술 전형에 관해서 어쩌고 저쩌고 묻길래 게시판에 붙여둔 자료를 보면서 얘기해줬더니 "어, 여기 이런 게 있었어요?" 라고 하는 식이다.

    애들이 원래 그렇긴 한데, 고3인데 더 심해졌다는 게 포인트.

    그래서 조금이라도 전달력을 높여보고자 핸드폰 내려놔, 이어폰 빼, 고개 들고 선생님이랑 눈 맞추면서 얘기하자, 궁금한 거 있으면 말해봐, 를 매일 아침 반복하는데 정말 이들이 알아들은 건지 아닌 건지 생각하고 대답한 건지 그냥 기계적으로 반응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이 은전 한 닢이 갖고 싶었습니다- 가 아니라,

    피드백 한 번이 받고 싶었습니다,

    리액션 한 번이 받고 싶었습니다, 라고 말하고픈 관종 담임샘의 이야기.

     

    이번에 코로나 사태로 도서실도 운영을 안 한다고 해서, 학급문고를 간만에 운영해볼까 싶었다.

    사실 코로나 생활수칙으로는 하지 말라는 짓이겠지. 서로 필기구도 빌려쓰지 말라고 하는 마당에 교실에서 책을 돌려보다니.. 하지만 보통 학급문고는 한 사람 손에 들어가면 한참 동안 책상 서랍 속에서 나오지 않고, 책을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돌려볼 리 없으며, 비닐 씌워 놓고 틈틈이 소독하면 되겠지 생각하면서 책 몇 권을 들고 갔다.

    이 책은 어떤 진로 생각하는 사람이 읽어보면 좋겠고, 어떤 과목 발표 때 어떠어떠하게 활용하면 좋겠다고 영업을 영업을 했는데 결국은 원래 책 좋아하는 애들이 몇 권 집어갔고. 그나마 책 소개할 때 "이 책 1등으로 읽어볼 사람!" 하고 가져간 책 말고는 책장에서 줄어들지 않았다. 만화책조차도. 옛날과 달라서 이젠 애들이 만화라는 이유로 손에 집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새롭게 책 몇 권을 샀는데, 비닐포장 한 다음에 들고 가야지.. 하곤 미루고 있던 차에 <독서논술대회> 공지가 붙었다. 학급문고에 넣으려고 <페스트>를 샀는데 마침 독서논술대회 지정도서까지 됐잖아. (독서논술대회 담당샘이 책 추천하러 다닐 때 "페스트"를 내가 추천했던 건 비밀. ㅋㅋ) 대회 공지하면서 넣어야겠다 싶어서, 비닐로 싼 <팩트풀니스>와 <페스트>를 들고 조회에 들어갔다.

    <팩트풀니스>는 요즘 베스트셀러인데, 나도 얼마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었는지 깨닫게 됐다, 확실한 정보와 통계에 기반해서 세상을 보는 자세를 배우고 싶다면 한 번 읽어봐라, 정도로 남들 다 하는 소개를 했고

    <페스트>도 코로나 시국에 뜨는 책인데 흑사병이 돌던 시절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랑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게 놀랍다. 이게 고전의 힘이다, +내가 학급문고용으로 산 책인데 마침 독서논술대회 지정도서니까 편하게 교실에서 읽어보라고 또 남들 다 하는 소개를 하고 책장에 꽂아놨다.

    그런데 오늘 자습시간에 들어가보니, 우리 반에서 가장 부정적인 A가 팩트풀니스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난 초반부가 재밌었는데, 읽을 만했어?"라고 물어보니 "초반부터 재미없던데요?"라고 역시나 청개구리같은 대꾸를 했지만(진짜 재미없으면 다시 돌려놨겠지) 그래도 내가 눈앞에 들이민 게 아닌데 애들이 자기 손으로 책을 가져가다니, 기록적이다!

    그리고 조용한 B가 페스트를 읽고 있었다. 독서논술대회 나가려고 보는 거냐 물었더니 그냥 보고 싶어서 보는 거래. 페이지 잘 넘어가냐고 물었더니 어렵지 않고 읽을 만하단다. 역시나 책을 읽을 생각을 했다는 게 기쁘다.

    말할 때 눈을 마주치는 것, 공감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반가운데 내가 애들한테 전하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걸 눈으로 확인하니 뿌듯해 죽겠다. 담임 처음하는 것도 아닌데 학급문고에 꽂힌 책 가져가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렇게 호들갑인지 나도 모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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