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 예민함, 감성,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들까 말까 한참 고민했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내 앞 대출자가 며칠만 더 늦게 반납했더라면 다시 도서관이 닫혀 만나지 못했을 이 책을, 지금 쥐고 있는 행운에 감사한다.
너무 아름다워서 어느 한 페이지를 고를 수가 없다. 손에 집히는 페이지를 펴서 가만 들여다 본다.
143 바르트에게 사진은 '어두운 방(camera obscura)'이 아니다. 사진은 '밝은 방(camera lucida)'이다. 살아있는 것이 이미지로 고정되는 죽음의 방, 그러나 빛으로 찬란한 방. 사라진 순간들이 '그때 거기에 있었음'의 빛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방. 그때 거기에서 사라진 당신의 순간들이 지금 여기에서 기적처럼, 부활처럼, 당신의 빛나는 모습들로 다시 태어나는 방.
당신이 남긴 부재의 공간도 밝은 방이다. 당신이 없는, 당신의 순간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떠난 당신이 매번 수없이 다시 내어나 내게로 돌아오는 방... ... 어떻게 내가 그 부재의 방을 떠날 수가 있단 말인가?
53 나를 다시 찾아도 나의 슬픔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석고상처럼, 화석처럼,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은 나의 슬픔을 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슬픔 곁을 지나쳐간다. 마치 파도들이 암초를 지나가도 암초는 남듯이. 그리하여 시간이 증명하는 건 시간이 아니다. 그건 슬픔이다.
192 오늘 같은 날, 햇빛이 너무 따뜻하고 맑은 날, 거리의 모든 것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날, 빨리 걸어가는 여자의 종아리가 투명한 날, 나는 그만 펑 눈물이 터지고 말아요. 지나가도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라고 나는 말했었죠. 아니에요, 지나가면 사라져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당신은 말했었죠.
한 단어 한 단어 혈관에 넣어 굴리고 싶다. 내 모국어가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였다는 것을 한 쪽 한 쪽 넘길 때마다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