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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그림 엄마, 한지혜책읽기, 기록 2020. 12. 22. 06:49
'선생님도 엄마 있어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애들이 많이 하는 패드립이 아니라, 아이들이 여기기에 '교사'는 NPC여서다. 교사다움을 갖추고 교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 그래서 교사가 인간적 결함이나 감정을 드러낼 때 그렇게 욕을 먹는 게 아닐까.그래도 '엄마'라는 존재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분명한 표상이 있고, 다른 정체성은 모두 그 역할에 가려지는 이 강력한 역할. 『물 그림 엄마』에는 다양한 엄마와 자식들이 등장한다. 엄마라는 이름에만 묻혀 납작해지지 않은 사람들.
첫 작품, <환생>부터 엄마 캐릭터의 의외성이 재미있다. 그 힘으로 이 소설집을 끝까지 읽게 됐지 싶다. 자식들을 돌보는 사람이기보다 항상 '자식들이 돌봐야 하는 사람'이었던 엄마는 말한다. '나는 니들 중 한 명의 자식이 될 것이다.' 이 말에 '엄마, 다음 생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 내가 엄마만큼 사랑할게....'하는 자식은 없다. 삼남매는 모두 체한다. 놀라서.(싫어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표제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물 그림 엄마>를 읽으면서 이 첫 소설을 다시 떠올렸다. 여기의 엄마는 환생 따윈 안 하겠다고 한다. 단지 귀신이 되어 나타났을 뿐.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아이가 태어나면서 시간을 돌려 아빠를 만날 수 없게 되듯 <물 그림 엄마>에서 물방울 같은 태동이 내 뱃속에서 터지면서 엄마는 내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다시 <환생>을 떠올린다. 뱃속의 내 자식으로 환생해서 엄마 귀신이 사라진 거 아니야?! 생각해놓고도 스스로 잠시 어이없었다. 아니지. 비가 내리던 날 처음 내 눈앞에 나타난 죽은 엄마, 물방울 같은 태동이 내 뱃속에서 터질 때 사라져 버린 엄마, 그때 가득한 빗물과 나의 눈물. 물흐르듯 헤어질 사람들은 헤어지고, 소멸한 것들은 소멸하고, 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겠지.
<토마토를 끓이는 밤>은 결말의 여운이 어마어마하다. 출구 없는 상황에서 냄비 가득 끓어오르는 붉은 토마토의 향기. 강렬한 이미지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진짜 기발하게 느껴졌던 부조리극.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내는 사람들이 소설을 쓰는 거구나.
<함께 춤을 추어요>도 재밌었다. 정말 빨리 읽히는 이야기였는데 스포를 할 수가 없어! 그냥 밑줄 그었던 부분을 남긴다.
(58p) 선생님, 왜 모든 문제에는 엄마가 있는 건가요? 왜 엄마와의 관계를 투영해야 하는 건가요? 내 엄마와의 문제도 내가 엄마가 되어서 해결해야 하고, 내 남편과의 문제도 내가 엄마가 되어서 해결해야 하고, 왜 나는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인 동시에 모든 아이의 엄마여야 하는 건가요.
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는 <누가 정혜를 죽였나>. 먼저 질투 사실주의ㅋㅋㅋㅋ에 끌렸다. 타고난 샘쟁이라 중고등학교 동창들의 갖가지 삶의 편린을 모조리 부러워하고, 상태 안 좋을 땐 사랑해 마지않는 아이돌과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벽지를 뜯는 나는 글쓰는 정혜의 행동 하나하나에 공감했다. 영화 쓰는 정혜와 자기를 비교하면서 포털에 누구 이름이 먼저 나오나 쳐 보고, 내가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가 배반당하고,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급해하고.
아이에게 시간과 영혼을 빼앗기는 걸 힘겨워하는 정혜의 모습이 내 또래 친구들 누군가의 고민 같기도 해서 잘 읽혔다. 현실에선 대부분 상상으로 그치지만 정말 갓난애를 두고 가출해버리는 정혜를 보면서는 좀 아찔했지만. 애 키우는 건 원래 그런 거라고, 하소연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 애 잘 키워,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혜가 소외감을 느끼는 부분에선 멈칫했다.
"애 잘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지금밖에 못해주는 게 있겠지"는 지금 친구들이 에너지를 쏟고 있는 육아라는 행위가 가치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종종 해준 말이기도 했다. 위로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또 아찔. 그저 피곤해서 하는 하소연이 아닐 수 있다는 거, 그 친구들 안에 어떤 꿈이 담겨 있는지 잘 들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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