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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한 사람들/도스토예프스키
    책읽기, 기록 2021. 2. 13. 17:30
    당신의 하루 일과를 될 수 있는 한 자세히 빠짐없이 편지에 써서 보내 주세요. 주변엔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그들과 지내기는 괜찮으신지 말이에요. 전 정말 모든 게 너무 궁금하답니다.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가난한 중년 남자 제부쉬낀과 그의 건너편 하숙집에서 사는 (똑같이 가난한) 젊은 여인 바르바라, 두 사람 다 편지를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써달라 조른다. 분명히 남녀 간의 사랑 맞는 것 같은데, 제부쉬낀이 계속 자기는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거라고 우겨서 처음에 좀 헷갈렸음. 

    1800년대에 이런 서간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다. 편지를 통해서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각자 혹은 함께 어떤 사건을 겪는지 조금씩 밝혀지는 구성 덕분에 페이지가 쭉쭉 넘어간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난할 수가 있나, 싶은 묘사와 설정도 인상적이다. 돈을 빌리러 다니는 비굴한 제부쉬낀의 모습도 그렇고, 작가 지인이 자신과 바르바라를 소재로 소설을 쓰려는 것 같아서 신경이 곤두선 그 상태도. 작가 라따자예프가 정말 그를 업신여기는 듯도 하면서, 가난함에 대한 자의식이 넘친 나머지 좀 과하게 예민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내가 눈치 없이 잘못 읽은 것이 아니기를....)

    압권은 옷이 너무너무 낡아서 상사에게 혼나다 말고 단추가 핑그르르 떨어져 나가서, 굴러가는 단추를 따라 가면서 몸을 굽히고 겨우 주워서 그걸 또 옷에 대고(왜 대? 그런다고 단추가 붙냐ㅠㅠㅠㅠㅠ 진짜 그 상황에서 왜 그렇게 어벙하게 행동하는 거야 없어보이게ㅠㅠㅠ) 또 떨어져 나가는, 정말 읽는 내가 민망해져서 어쩌질 못하겠는 장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얼마나 섬세하게 관찰하고 통찰해내면 극한의 가난함과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부끄러움을 이렇게 집어낼 수 있는 것인가. 

     

    서류도 부지런히 정서했어요. 하지만 그 다음엔 어땠는지 아세요! 어느 순간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더니 온통 칙칙하고 어두운 게 예전하고 똑같더군요. 똑같은 잉크 자국, 똑같은 책상과 서류, 저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제부쉬낀이 러시아 소설의 대표직업인 구등문관이라는 데부터 고골의 <외투>가 연상됐다. 하루 종일 앉아 복사기처럼 서류를 똑같이 베껴쓰는 일만을 반복하는 <외투>의 주인공 아까끼. 게다가 제부쉬낀이 <외투>와 같은 소설을 읽고 분개하는 장면에서는 도스토옙이 사실주의를 비판하고 싶은 건가? 하고 의아했다. 나중에 해설을 보니 아까끼와 달리 자의식과 자존심을 지닌 제부쉬낀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것.

     

    〈어떤 관청에 다니는 9등 문관 아무개 관리는 신발 밖으로 맨 발가락이 비어져 나왔네. 팔꿈치도 다 해져서 구멍이 났잖아〉. 그들은 자기 글에 이런 것을 묘사해 넣고 쓰레기만도 못한 것을 책이랍시고 찍어 낸단 말입니다……. 내 팔꿈치에 구멍이 나서 찢어진 게 자기하고 무슨 상관이라고요!

     

    자존심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제부쉬낀은 읽고 쓰는 것에도 관심을 갖는다. 문장이 좋지 않지만 연습하고 있다고 고백하거나, 바르바라에게 재미있게 읽은 책을 추천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릴적 자신을 가르치던 뽀끄로프스키를 통해 문학적 식견을 키워온 바르바라는 단숨에 그러한 책들은 수준 낮다고 무시하고 다른 책을 선물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작품이기에 책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을 작가론적으로 해석해야 하나, 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작가로서의 출사표 같은 건가, 하고 어렴풋이 해석했는데 석영중샘의 해석을 보니 내가 완전 헤매고 있었단 걸 깨달음.

    바르바라는 지적인 소통을 중요시했고, 가정교사인 뽀끄로프스키의 책장을 둘러보며 그가 읽은 책을 자신도 모조리 읽고 싶다고 여기는 데에서 책을 통한 의사소통의 가능성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선택하기에 서류를 옮겨쓰고 수준낮은 소설을 읽는 제부쉬낀은 금전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너무 빈곤한 사람인 것이다.

     

    아, 소중한 이여, 문장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저는 지금 무슨 말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쓴 것을 다시 읽어 보지도 않습니다. 문장을 고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뭔가를 쓰기 위해 저는 이러고 있습니다, 당신께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얘길 쓰려고요…….

    그러나 바르바라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제부쉬낀(과 그의 문장)은 성장한다. 마지막 편지에서 제부쉬낀은 절규한다.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없다면 문장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석 교수는 이를 '글쓰기의 존재론'으로 해석한다. 제부쉬낀에게 있어 (바르바라를 향해) 쓰기란 곧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글을 멀리하다가 집어든 책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게 괜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읽기 쓰기가 너의 존재에는 어떤 의미였니? 글을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칠 것처럼 보낸 한 달은 어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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